같은 이름이라도 로스터마다 붙이는 지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배전도는 볶은 시간이 아니라 원두 색으로 정하는 값이고, 그 색이 바뀌면 원두의 조직과 성분이 함께 바뀝니다. 그래서 배전도를 바꾸면 분쇄도와 물 온도도 같이 옮겨야 합니다.
이 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
- 배전도를 시간이 아니라 색으로 정하는 이유와 국제적으로 쓰이는 수치 기준
- 1차 크랙·2차 크랙이 일어나는 원두 내부 온도와 그 원리
- 약배전·중배전·강배전 각각에서 표면·향미·산미가 어떻게 달라지는가
- 협회 커핑이 기준으로 삼는 배전 구간과 그 근거
- 배전도가 바뀔 때 분쇄도와 물 온도를 어느 방향으로 옮겨야 하는가
- 카페인과 클로로겐산이 배전도에 따라 실제로 어떻게 변하는가
1. 배전도는 시간이 아니라 색으로 정합니다
"몇 분 볶았느냐"로 배전도를 말하는 경우가 많지만, 실무에서 쓰이는 기준은 시간이 아니라 색입니다. 같은 12분이라도 생두의 밀도와 수분, 로스터의 크기와 화력에 따라 결과가 전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업계는 근적외선으로 원두 표면의 밝기를 재는 애그트론(Agtron) 수치를 공통 언어로 씁니다. 숫자가 클수록 밝고, 작을수록 어둡습니다.
커피 전문 평가 매체 Coffee Review가 공개한 애그트론 M-Basic(고메) 스케일 기준 구간은 다음과 같습니다. 국내에서 흔히 쓰는 "약·중·강"이 어디에 대응하는지 확인하는 용도로 보시면 됩니다.
| 구분 | 애그트론 수치 | 표면과 색 |
|---|---|---|
| 라이트(약배전) | 80 초과 | 밝은 갈색~시나몬색, 기름기 없음 |
| 미디엄 라이트 | 70~80 | 조금 밝은 갈색, 표면이 마름 |
| 미디엄(중배전) | 60~70 | 중간 갈색, 표면이 마름 |
| 미디엄 다크 | 50~60 | 진한 갈색, 기름 방울이 맺히기 시작 |
| 다크(강배전) | 40~50 | 흑갈색, 기름 반점에서 광택까지 |
| 베리 다크 | 25~40 | 검은 표면에 기름이 고르게 번짐 |
표를 보면 기름이 배어나는 지점이 대략 애그트론 60 아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원두 봉투를 열었을 때 표면이 뽀얗게 말라 있으면 중배전 이하, 손에 기름이 묻으면 중강배전 이상이라고 어림잡을 수 있는 근거가 여기에 있습니다.
2. 두 번의 크랙이 구간을 나눕니다
배전도의 경계는 로스터가 임의로 나눈 것이 아니라, 원두 안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두 번의 파열음을 기준으로 잡혀 있습니다.
두 크랙은 소리만 다른 것이 아니라 원인 자체가 다릅니다. 로스팅 자료를 오래 축적해 온 스위트마리아스의 기술 문서에 따르면, 1차 크랙은 생두에 남은 10~12%의 수분이 수증기로 바뀌면서 만드는 압력이 원두 조직을 밀어낼 때 발생합니다. 이때 원두는 부풀고 가운데 센터컷이 벌어집니다.
반면 2차 크랙은 물이 아니라 이산화탄소가 원인입니다. 앞선 가열로 조직이 이미 푸석해진 상태에서 내부에 쌓인 이산화탄소·일산화탄소·질소의 압력이 한계를 넘으면서 조직이 갈라집니다. 그래서 1차가 "퍽" 하고 터지는 소리라면 2차는 잔가지가 부러지는 듯한 잔소리에 가깝습니다.
여기서 실무적인 기준이 나옵니다. 1차 크랙이 끝난 직후에서 2차 크랙 직전까지가 약배전~중배전 구간이고, 2차 크랙이 시작된 이후가 강배전 구간입니다. 봉투 뒷면의 배전 표기를 볼 때, 이 두 지점 중 어디를 지났는지로 읽으면 이해가 빠릅니다.
3. 약배전 — 산미가 남고 표면이 마른 구간
약배전은 1차 크랙을 지난 직후에 배출한 상태입니다. 열을 덜 받았으므로 생두가 원래 가지고 있던 성분이 가장 많이 남아 있습니다. 산지와 품종, 가공방식의 차이가 잔에서 뚜렷하게 드러나는 이유입니다.
이 구간의 특징을 가르는 핵심 성분이 클로로겐산입니다. 2021년 Molecules에 실린 HPLC 측정 연구는 같은 원두를 배전도만 바꿔 분석했는데, 클로로겐산은 생두 543.23mg/L에서 약배전 270.93 → 중배전 187.45 → 강배전 90.53mg/L로 계단처럼 줄었습니다. 생두 대비 약 6분의 1까지 떨어진 것입니다. 클로로겐산은 커피 산미와 밝은 인상에 관여하는 성분이라, 이 감소 곡선이 곧 "배전도가 깊어질수록 산미가 사라진다"는 현상의 물질적 근거가 됩니다.
감각 평가에서도 방향이 같습니다. 2024년 Chemosensors에 실린 전자혀 연구는 네 단계 배전도(L* 25 · 22.5 · 19.5 · 17)를 비교해 배전도가 깊어질수록 산미 지표가 일관되게 낮아지고 쓴맛 지표는 반대로 올라간다고 보고했습니다.
4. 중배전 — 협회 커핑이 기준으로 삼는 구간
중배전은 산미와 단맛, 바디가 가장 균형을 이루는 구간으로 평가됩니다. 여기에는 근거가 있습니다. 스페셜티커피협회(SCA)의 커핑 프로토콜이 평가용 샘플 로스팅을 이 부근으로 못 박아 두었기 때문입니다.
주목할 부분은 협회가 평가 기준으로 삼은 지점이 강배전이 아니라 밝은 쪽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두운 배전은 산지 특성을 덮어 버려 원두 사이의 차이를 구분하기 어렵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것은 "평가에 유리한 배전"이지 "가장 맛있는 배전"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마시는 목적과 기구에 따라 적정 구간은 얼마든지 달라집니다.
5. 강배전 — 쓴맛이 앞서고 기름이 배어나는 구간
강배전은 2차 크랙 이후 구간입니다. 이 지점을 지나면 원두는 세 가지가 동시에 바뀝니다.
| 바뀌는 것 | 내용 | 잔에서의 결과 |
|---|---|---|
| 표면 | 내부 오일이 밖으로 밀려 나와 광택이 생김 | 산패가 빨라져 보관 기간이 짧아짐 |
| 조직 | 가스 팽창으로 다공질이 되어 부서지기 쉬움 | 성분이 빨리 빠져나와 과다추출 위험 |
| 성분 | 클로로겐산 급감, 쓴맛 관련 화합물 증가 | 산미가 사라지고 탄 향·다크초콜릿 인상 |
강배전에서 흔히 오해되는 지점이 표면의 기름입니다. 기름이 보인다고 해서 상한 것은 아닙니다. 배전도가 깊어지면서 조직 안쪽의 오일이 밖으로 밀려 나온 정상적인 현상입니다. 다만 공기와 직접 닿는 면적이 늘어난 상태이므로, 같은 조건에서 밝은 배전 원두보다 산패가 빠르다는 점은 사실입니다. 강배전 원두를 조금씩 자주 사라는 조언의 근거가 이것입니다.
6. 배전도가 바뀌면 분쇄도와 물 온도도 바꿉니다
같은 레시피를 배전도만 바꿔서 그대로 쓰면 거의 반드시 어긋납니다. 원두의 구조 자체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로스팅 데이터 분석 회사 크롭스터는 이 관계를 한 문장으로 정리합니다. "어두운 배전이 밝은 배전보다 추출하기 쉽다. 다공질이라 가용 성분을 더 쉽게 내어놓기 때문이다." 같은 조건으로 내리면 강배전 쪽의 추출 수율이 더 높게 나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조정 방향은 좌우 대칭입니다.
분쇄도의 영향력이 배전도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도 확인돼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Chemosensors 연구는 입자 크기를 중앙값 600 · 796 · 1,055 · 1,400μm 네 단계로 바꿔 가며 비교했는데, 분쇄도가 산미에 미치는 영향은 밝은 배전에서 더 크고, 쓴맛에 미치는 영향은 어두운 배전에서 더 컸습니다. 강배전 원두에서 분쇄도를 조금만 곱게 해도 급격히 써지는 경험이 여기서 설명됩니다.
7. 카페인은 어느 쪽이 많은가
"약배전이 카페인이 더 많다"는 말과 "강배전이 더 세다"는 말이 함께 돌아다닙니다. 실제 측정값을 보면 둘 다 정확하지 않습니다.
| 상태 | 카페인 | 클로로겐산 |
|---|---|---|
| 생두 | 166.72 mg/L | 543.23 mg/L |
| 약배전 | 196.35 mg/L | 270.93 mg/L |
| 중배전 | 203.63 mg/L | 187.45 mg/L |
| 강배전 | 189.85 mg/L | 90.53 mg/L |
2021년 Molecules 측정에서 카페인은 중배전에서 가장 높고 강배전에서 조금 떨어지는 완만한 곡선을 그렸습니다. 배전도 사이의 차이는 클로로겐산처럼 크지 않습니다. 같은 해 Processes에 실린 다른 연구에서는 산지에 따라 강배전에서 카페인이 가장 높게 나온 표본도 있어, 방향이 원두마다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정리하면 카페인은 배전도에 크게 좌우되지 않습니다. 잔에 들어가는 카페인 양을 실제로 결정하는 것은 배전도보다 원두를 몇 그램 썼는지와 어떤 방식으로 얼마나 뽑았는지입니다. 다만 계량을 부피(스푼)로 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강배전 원두는 부풀어 밀도가 낮아 같은 부피에 든 원두 무게가 적기 때문입니다. 저울로 무게를 재는 것이 이 혼란을 없애는 가장 간단한 방법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이름보다 색과 표면을 보십시오
배전도 이름은 로스터마다 다르게 붙습니다. 그래서 "중배전을 샀는데 생각한 맛이 아니다"라는 일이 자주 생깁니다. 이름 대신 색과 표면 상태, 그리고 가능하면 애그트론 수치를 확인하는 습관이 이 혼란을 대부분 없애 줍니다.
그리고 배전도를 바꿨다면 추출 조건도 함께 옮겨 주십시오. 밝은 쪽으로 갔다면 곱게·뜨겁게, 어두운 쪽으로 갔다면 굵게·낮은 온도로. 원두를 탓하기 전에 이 한 단계만 맞춰도 잔의 인상이 달라집니다.
요약
- 배전도는 시간이 아니라 색으로 정합니다. 애그트론 M-Basic 기준 라이트 80 초과, 미디엄 60~70, 다크 40~50입니다.
- 기름이 배어나는 경계는 대략 애그트론 60입니다. 표면이 마르면 중배전 이하, 광택이 있으면 중강배전 이상입니다.
- 1차 크랙은 수분이, 2차 크랙은 이산화탄소가 만듭니다. 각각 원두 내부 201~208℃, 225~232℃ 부근입니다.
- 클로로겐산은 배전이 깊어질수록 급감합니다. 생두 543 → 약배전 271 → 중배전 187 → 강배전 91mg/L. 산미가 사라지는 물질적 이유입니다.
- SCA 커핑 기준 배전은 홀빈 애그트론 58 · 분쇄 63, 로스팅 8~12분, 휴지 8시간 이상입니다.
- 어두운 배전은 다공질이라 추출이 쉽습니다. 약배전은 곱게·뜨겁게, 강배전은 굵게·낮은 온도로 옮깁니다.
- 카페인은 배전도에 크게 좌우되지 않습니다. 중배전에서 가장 높게 측정됐고 차이는 완만했습니다. 부피가 아니라 무게로 계량하십시오.